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스 1세 (문단 편집) == [[기독교]] 문제 == 더 큰 문제, 그러니까 스코틀랜드의 반란 문제로부터 시작하는 문제는 찰스가 즉위하고부터 착실히 뿌린 씨앗을 거둬들인 결과일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칼뱅파 교육을 받았음에도 청교도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왕권 강화를 위해 39개 신조에 기반한 [[잉글랜드 국교회]] 일원화 정책을 지속했고, 이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까지 강요하여 분란이 되었다. 다만 아버지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에서 의회와 대립했으나 통치는 원만하게 해냈으며 스코틀랜드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스코틀랜드에서 자란 만큼, 스코틀랜드를 잘 알기에 스코틀랜드인들을 다스리는 데는 능숙했고 애착심을 여러 차례 보이는 방법으로 스코틀랜드 귀족과 평민들의 신망을 받아 통치에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고서도 수시로 스코틀랜드를 방문했고 스코틀랜드의 유력 클랜 귀족들과 만남을 가지며 회유하면서 그들과 친분을 가지며 지지를 얻었기에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 자란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애착이 없었고, 스코틀랜드를 무시하는 바람에 그들의 불만을 불러왔다. [[헨리 8세]] 이래로 종교에 의한 피바람을 몇 번이나 맞았던 잉글랜드였기 때문에, 가톨릭교도인 왕비의 존재는 곧 찰스가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화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찰스가 [[캔터베리 대주교]]로 '고교회파(가톨릭의 전통을 일부 회복하려던 성공회 내부의 경향)'인 윌리엄 로드(William Laud, 15731645)를 지명하자 분쟁은 커져만 갔다. 더더욱 심각한 것은 윌리엄 로드의 됨됨이였다. 매우 전투적이었던 그는 성공회의 세력권에 침입한 [[청교도]]를 '박멸'하기 위해 그들의 코나 귀를 자르는 만행을 서슴치 않던 자였고, [[장로회]]가 우세한 스코틀랜드 지역에 잉글랜드 성공회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무리수]]를 두었으며, 이때문에 1639년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이는 상당부분 청교도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귀 자르기 사건은 단 한번 일어났으며, 이는 국왕에 대한 심각한 모독죄 때문이었지 단순히 청교도여서가 아니다. 오히려 최근 역사학자들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목이 아니라 귀가 잘린게 더 신기하다고 말할 정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